닳아 없어지는 것
고등학생 때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나는 용돈을 받으면 그 돈으로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고 군것질하고, 용돈을 받으면서도 부모님한테 졸라서 유명 메이커 옷도 사고 신발도사고 하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 나는 더 이상 부모님한테 손을 벌려선 안되겠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는 처음 내 힘으로 번 돈으로 부모님 옷을 사드렸고 효도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러곤 남은 돈으로 나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껏 샀다. 그렇게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버는 족족 다 써버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언제나처럼 항상 비어있는 말일 날 나의 통장잔고를 보고 문득 이제는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힘들게 번 돈을 낭비할 순 없으니 차라리 모아서 여행을 가자고 결심했고 결국 이왕 할거 아예 1년 휴학을 하고 6개월간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서 6개월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오겠다고 계획을 세웠다. 여행을 다녀와서는 남은 학교생활 학점관리 열심히 해서 졸업하고 학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회계사준비를 하면 되겠다는 나 나름에 미래계획과 목표도 함께 생각하면서 만족해 하고 있었다.
나는 예전부터 추구해 오던 미래의 모습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꾸준히 나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자주적인 여성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이런 이상향을 갖게 된 데에는 우리 엄마의 영향이 크다. 나의 부모님은 신문을 유통하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생활패턴이 정반대이다. 그래서 낮에는 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그러니 내가 집에 와서 보는 엄마는 낮잠을 자거나 드라마를 보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때마다 내가 엄마한테 하는 말이 있다. “엄마 맨날 집에만 있지 말고 취미생활 좀 해. 아니면 여행이라도 다니던가.” 그러면 우리 엄마는 “피곤해.” 이말 뿐이었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은 피곤하고 돈만 많이 든다며 싫어하던 엄마가 친구들과 푸켓으로 4박5일 여행을 간다며 들떠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다 들뜨고 기뻤다. 며칠 뒤 엄마는 챙 넓은 모자에 선글라스를 끼고 해외로 떠났고 그렇게 우리 가족은 엄마 없는 4박5일을 보내야 했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동생과 아빠 아침밥을 챙겼다. 저녁에는 수업을 다 마치고 집에 오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집 청소를 했다. 주말에도 역시 나는 가족들 밥을 챙겨주고 집안에 밀린 청소를 하느라 하루의 반나절을 다 보내야 했다. 아빠와 동생은 나가고 혼자 기진맥진해진 채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데 갑자기 집안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주변을 둘러보는데 너무 적막하고 허전했다. 엄마는 집에 있을 때 항상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자서는 너무 공허한데 몸은 힘들고 그래서 잠을 자고 드라마만 봐야 했던 걸까 그렇게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만 기다린 걸까. 엄마는 한결 밝아진 얼굴을 하고선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부터 난 엄마를 유심히 관찰하게 됐다. 1년 365일 일요일을 제외하고 눈이 오나 비가오나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러 나가는 엄마의 발자국 소리,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우리들 아침밥을 챙겨주고 소파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엄마의 모습, 옷 갈아입을 때 마다 보이던 엄마의 몸을 뒤덮은 수많은 파스, 탁자 위에 점점 쌓여가는 약봉지, 어느새 늙어버린 엄마의 얼굴과 사이사이로 보이는 흰 머리카락. 난 왜 이제껏 몰랐던 걸까. 내가 첫 월급으로 사준 옷을 아직도 입기 아까워서 옷장 속에 걸어만 두는 우리엄마가 내 앞길만 바라보고 걸어가는 날 위해 내 뒤에서 병풍이 되어주느라 이렇게 닳아버렸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나는 가슴이 조여오는 것 같았다. 엄마를 바라볼 때마다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는 넌지시 엄마한테 언제까지 그 일을 계속할 건지 물어봤다. 엄마는 뭘 그렇게 당연한걸 묻냐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동생 대학졸업하고 너 시집 보낼 때까지 해야지”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또다시 깨달았다. 내가 내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부모님은 점점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소중한 것이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아끼고 아껴 사용한다. 새 신발이나 옷, 핸드폰을 사면 흠집 하나 안 나게 하려고 애지중지 사용하는 것처럼. 부모님이라는 존재도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고 없어선 안될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우리 부모님이 닳지 않도록 하루빨리 그들의 병풍이 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