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2015-2 자유주제 에세이대회 최우수작(박*혜)
2015-12-01 08:55:09 조회수1222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다른 학교에서 체육대회라던가 학예회 같은 행사를 할 때, 내가 나온 초등학교는 ‘전통놀이 한마당’이라는 놀이 잔치를 할 정도로 향토색이 짙은 곳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너나 할 것 없이 사물함에서 제기와 줄팽이를 꺼내들어 오재미와 팽이치기 같은, 다분히 예스러운 놀이들를 하며 뛰놀았을 정도니 말이다. ( 그 흔한 강당은 물론이거니와 그네나 미끄럼틀 같은 놀이기구도 없었다. ) 전통놀이 시범학교로 지정된 이후에는 다양한 민속놀이 CA까지 이뤄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았던 부가 바로 ‘풍물놀이’였다. 일명 ‘풍물부‘로 불렸던 이 동아리는 마치 다른 학교의 밴드부처럼 팬클럽(?)을 양성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가장 큰 행사인 전통놀이한마당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축제의 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이러한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공연에 오를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빳빳하게 각 잡힌 한복을 입고 항상 뒷짐에 궁채 궁채 [명사] [음악] 풍물놀이 따위에서, 장구를 칠 때에 왼손에 쥐고 장단을 치는 채. 곧은 대나무 뿌리 막대기에 박달나무를 동그랗게 깎아 끼워서 만든다.

를 쥐고 계셨던 지도 선생님 때문이었다. 

내가 풍물놀이 부에 들어간 첫 날,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열 맞춰 앉히시고는 정갈한 글씨로 칠판위에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써내려 가셨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 속의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본다.’ 벌써 15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눈을 감고 암송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날의 선생님 백묵글씨가 또렷하게 기억난다. 고작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고목나무 같은 표정으로 ‘내일까지 외워서 낭송을 멋지게 하는 사람만이 장구채를 쥘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너무도 어렸던 나는 시를 깊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첫 절과 끝 절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사슴.. 길어서 예쁘게만 보였던 사슴이 슬픈 모가지로 혼자 쓸쓸히 산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서 어린마음에 사슴이 불쌍했다. 그렇게 나는 하루 종일 내 안에서 그려지는 사슴을 생각하면서 시를 곱씹었고, 다음날 멋지게 낭송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풍물놀이 ‘서당’의 시작이었다. 

풍물부에 들어왔다는 기쁨을 만끽할 틈도 없이 입부 후 한 달이 지나도록 나는 장단 한 구절도 쳐 볼 수 없었다. 한 달 내내 손목에 핏망울이 질 때까지 궁채를 내려치는 연습만 시키셨던 것이다. 축제에서 봤던 화려한 장구장단들을 배울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지루한 연습만 계속 이어졌다. 단군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처럼, 지루함이라는 시련을 못이긴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문을 박차고 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나 또한 벌겋게 부어오른 손목을 볼 때마다 억울함에 북받쳐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대쪽같이 연습만 시키시는 선생님이 너무도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째선지 나는 그런 선생님의 단호한 무게감이 묘하게 싫지만은 않았다. 입부 첫 날, 영문 모를 시 구절이 주었던 아릿한 여운 때문이었을까, 나는 무엇에 이끌리듯이 이를 악물고 연습을 해 나갔다. 그렇게 매일 궁채를 장구에 내리쳐서 손목에 피가 나고 어느 순간 굳은살이 박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을 쯤이었다. 어김없이 붕대를 고쳐 매고 채를 휘두른 나는 ‘궁-’하고 울리는 장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제서야 마른 웃음을 살짝 내비치시며 다른 장단을 하나 둘 알려주시기 시작하셨다. 그랬다. 선생님께서는 ‘때’를 두셨던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머리로 외운 장단으로 요란히 울려대는 소음이 아니라 인고하고 기다린 끝에 아무런 사심없이 울리는 ‘진짜 울림‘이 얼마나 벅찬지, 아픔과 인고의 시간을 거친 결과물에 얼마나 값진 기쁨이 되는지를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난데없이 시를 외게 하심에 있어서도 소리를 내는 감성을 일러주시려는 뜻이었음을 나중에서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새로운 장단으로 넘어갈 때마다 윤동주의 서시, 천상명의 귀천, 정지용의 호수등, 초등학생이 ?조리기에는 심하게 어른스러웠던 시들을 하나씩 빠지지 않고 늘려가셨다. )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옆 교실에서 보냈던 풍물부에서의 이 기억은 내 초등학생 시절 가장 큰 기쁨이자 지금의 내 삶과 가치관에 중요한 지지대역할을 해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나무냄새가득한 과거의 기억을 요즘 ‘n포세대’로 대변되는 나의 20대 일상 속에서 심심찮게 회상하곤 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이라 불릴 만큼 국민 대부분이 질 높은 교육을 받고 있고, 학업성취 지표 역시 우수한 성적을 기록 하고 있지만, 막상 ‘행복은 무엇인가’, ‘꿈이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조차 면접용 모범답안을 작성하지 않으면 입도 뻥긋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빠른 선행학습으로 수도 없이 많은 문제를 풀며 공부해왔다. 하지만 자소서 창을 켜고 나를 서술하는 지금, 진실로 ‘나는 배웠다’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못할 만큼 나의 배움에 부끄러움만이 가득하다. 신영복씨는 그의 저서 ‘담론’에서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발로 이어지는 ‘긴 여행’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빠르게 얻지 못할 결과에 두려워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가슴으로 진정 느끼지 못하고 머리로 빨리 이해하려고만 하는 지금의 우리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내 어린시절, 손목의 피멍이 아프고 서러웠지만 그 끝에 청아한 장구의 울림을 들었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현 젊은 세대가 꼰대라고 지칭하는 어른의 형상을 한 그 선생님의 가르침이 지금에서야 나에게 도끼가 되어 내려 찍히고 있다. 인생이라는 긴 여행의 시간동안 온전한 나의 꽃을 피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임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인내하고 겸손한 자세로 꾸준히 갈고 닦으며 기다려야한다. 뿐만 아니라 시 한 구절의 한(恨)에서 절절함을 느낄 줄 아는 따뜻한 정서로써, 느끼고 공감하며 삶을 가꿔 나가야하며 그것이 진정한 삶의 배움이지 않을까. 

지난 밤,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 못 다한 과제를 끝마치고 귀가하는 길위로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들이 사각사각 밟히었다. 시큼 쌉쌀한 이파리의 냄새와 취업과 미래에 대한 고단한 고민들 속에서 잊고 있던 그 시절 기억이 피어올랐다. 탈무드에 나오는 랍비처럼 매 순간 나에게 지혜를 주셨던 선생님...아무 생각 없이 눈앞의 일들만 급급했던 근래의 나를 보면 호되게 궁채로 꿀밤을 맞을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이 들면서 ‘힘내자’하고 나를 다시 일으켜 보았다.

QUICK MENU SERVICE
 
사이트맵 닫기